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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에 길을 묻다 007
박석준(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동의과학연구소 소장)
맹자의 위험성
흔히 봄에는 따사로운 『논어』를 읽고 여름에는 시원한 『맹자』를 읽으라고 한다. 확실히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은 대개 짧고 간결하며 무엇보다 단정하지 않는다. 부정을 해도 ‘잘 모르겠다(不知)’든가 ‘그런 적은 없거나 드물다(鮮矣)’라고 말한다. 그러나 맹자는 첫 마디부터 ‘하필이면 그런 말을 하고 있냐?(何必曰)’고 되묻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든다. 상대의 허점을 찾아 일사천리로 말을 이어간다. 사람들은 그런 맹자의 글을 읽으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달걀을 세울 때 콜럼부스처럼 세운다면 그것은 문제를 푼 것도 아니고 나아가 달걀도 못 먹게 한 것이다. 아기를 목욕시키고 나서 더러운 물을 버린다고 물과 함께 아기도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 두 번째 논쟁
고자가 말했다.
“본성은 여울물과 같아서 동쪽으로 물꼬를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른다. 사람의 본성도 선이나 선하지 않음의 구분이 없다. 이는 마치 물이 동서를 구분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맹자가 말한다.
“물은 참으로 동서를 구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아래의 구분도 없다는 말인가?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아서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물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제 물을 쳐서 머리 위로 튀어 오르게 할 수 있고 막아서 거꾸로 흐르게 하여 산위에 있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그 형세[세勢]가 그렇게 되게 한 것뿐이다. 사람이 선하지 않게 되는 것도 그 사람의 본성이 [형세에 의해 바뀐] 물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고자에 따르면 여울물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 지는 외적인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 물이 악해서 동쪽으로 흐르거나 선해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자는 물이 아니라 여울물을 예로 들었다. 여울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있어야 한다. 위와 아래는 여울물이 흐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다만 고자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맹자는 바로 이 전제조건을 문제 삼고 있다(여기서부터 논쟁의 주제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동서는 좌우의 개념이다. 이는 물의 본성과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맹자는 상하 개념을 내세워 일거에 고자의 주장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도 인정한 것처럼 물은 위로도 가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외적인 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물의 본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한다.
맹자의 주장에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한지 아닌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이를 전제로 하여 판단한다면 그것은 증명이 아니다. 이는 또한 자연적인 사실에 대한 서술(물은 아래로 흐른다)이 곧바로 윤리적인 가치 판단(사람은 선하다)과 동일하다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진 것이 된다(김영건, 『동양철학에 관한 분석적 비판』). 이는 차이를 곧바로 차별로 보는 관점과도 통한다.
이러한 인식론을 유비추리(유추類推)라고 하는데, 유추는 초보적인 인식의 방법이 아니라 ‘사고의 연료이자 불길’(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외, 『유추, 사고의 본질』)이기도 하다. 물론 유추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추상抽象의 과정을 거쳐야 올바른 개념으로 발전하는 것이지만, 유추는 매우 중요한 사고의 계기가 된다. 다만 유추가 문제로 되는 것은 유추한 것을 곧바로 당위와 연결시킬 때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선하다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본성에서 유추해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그래야 한다는 당위로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착하다는 것과 착해야 한다는 것은 다르다. 그냥 사람이 착하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착한 일을 하거나 착하지 않은 일을 하거나 그것은 차이일 뿐이다. 만일 선이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불선은 선하게 고쳐나가면 된다. 그런데 사람은 착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선이 아닌 모든 것은 불선이 되고 그것은 반드시 없애야 하는 것이 된다.
공자는 도나 덕, 인 등에 대해 고정적인 규정을 하지 않았다. 공자에게 인은 주체인 내가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실천해 가지만 주객관적인 조건에 따라[시時] 거기에 적절한 방법[권權]으로 대처하며 끊임없이 나를 고쳐나감으로써[극기克己]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공자는 궁극적으로 내가 인을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반면에 맹자에게 있어 선은 이미 전제된 것으로 당위의 문제였다. 선이 아닌 것은 모두 불선이며 불선은 없애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유림儒林이라고 하는 집단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언행들(예로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은 이러한 맹자의 인식론에 기초하여 나오는 것이다.
맹자와 같은 태도는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도 갖고 있다. 대표적인 것인 건강에 대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혈압은 120/80이라는 기준[선善]을 중심으로 고혈압과 저혈압으로 나뉘고 이는 병으로 규정되어[불선不善] 치료해야 하는 것[당위]이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프로쿠르테스Procrustes의 침대는 도처에 널려 있다.
맹자식의 사고의 위험성은 사회문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생긴다. 맹자에게는 자연 역시 당위의 대상일 뿐이어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하는 노동자(당시로서는 농민)의 인식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자연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맹자가 아니라 고자의 관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