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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월령의 지혜를 배운다
5월, 초록 전사들의 말을 듣다

봄 산을 흐드러지게 했던 산벚꽃들이 초록 속으로 사라지는 5월에는 절기 입하와 소만이 들어 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기르던 모종들도 입하 전까지는 다 밭으로 나갑니다. 이때 농부는 초록생명을 흙에 모시는 전사(戰士)입니다. 흙살림 동일한의원 원장 박석준이 말합니다. 3월 중순에 “저만치서 살살 걸어오시는 어르신께/ 이젠 봄이네요 아침인사를 하니/ 감정도 싣지 않고/ 표정 변화도 없이/ 달싹거리는 입술로/ 이제 농사 시작해야지 하시며 지나더란다// 한데 그 들릴락말락한 말씀이 얼마나 강렬한지/ 농전지사(農戰之士)라는 말과 함께/ 전사(戰士)라는 말이 떠올랐다고”. 아마 천지의 명령에 한 치의 오차도 두지 않고 따르는 삶의 자세에서 진정한 전사의 느낌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새너디 할매가 마늘밭 풀을 맨다// 일자도 장소도 틀림없이/ 지난해와 똑같은 날, 똑같은 밭이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미숫가루 한 그릇 타드리고/ 쑥떡 한 덩어리 얻어먹는데,/ 해 지기 전에 비가 칠 것 같다는 한 소식 전해 주신다/ 이런 날 모종이 잘 된단다/ 그래요?// 부랴부랴 읍내 종묘상 다녀와서/ 고추 모종을 한다/ 가지 모종을 한다/ 수박 모종을 한다/ 호박 모종 심는다/ 단호박 모종도 단단히 한다/ 어라, 진짜네?// 해 지기 전 비가 쳐서/ 강변에 매어 놓은 염소 먼저 들인다// 굵은 비 아까워서/ 물외 모종 심는다/ 참외 모종 심는다/ 토마토 모종 심는다/ 빗방울도 방울방울/ 방울토마토와 같이 심는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박성우「입하」에서) 새너디 할매의 몸이 천지의 순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흙과 더불어 하는 생산의 전사를 거쳐 이제 천지의 움직임까지 읽는 지식을 갖게 된 분입니다. 어쩌면 천지의 법이 현현한 ‘화신’(化身, Incarnation ?추상적인 개념에 육체를 부여하여 인간의 형상을 갖추는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 속의 이 귀한 분들은 모두 ‘허리 어께 팔 무릎’이 아프신 분이고 해마다 묵정밭이 늘어납니다. 하루빨리 농업의 공공재 역할을 실현하는 농민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제도가 실현되고, 어르신들의 초록 지혜가 이 땅에 뿌리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농부전사가 모신 논밭의 초록생명들도 초록불꽃의 말을 합니다.
만평을 가득 채운 작물
흙으로 들어간 씨앗이 초록 싹을 올리고
제 모습으로 타오르고 있다
저 고요하고 격렬한 초록불꽃들 -줄임-
지상에서의 삶은 오직 자기의 어깨를 딛고
조금씩 오늘을 넘어서 타오르는 것임을
오호라 사랑은 일체의 허구 없는
사랑할 수 있는 몸의 일이라는 걸
만평을 가득 채운 초록불꽃 지금 일렁인다
자기를 넘쳐 자기에게로 가는
매일매일이 서막인 저 사랑이여
- 오철수 「초록불꽃을 사랑하다」에서
- 오철수(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