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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월령의 지혜를 배운다
4월, 흙의 지극한 몸에 초록 생명을 모신다

청명과 곡우가 들어 있는 4월은 초록 싹이 납니다. 농사 첫해 3월의 잊지 못할 체험이 <흙>이었다면 4월은 <초록생명>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밭 만들기가 끝나면 그 밭에 작물을 심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하지감자를 가장 먼저 심지만 이 시기 비닐하우스에서는 밭으로 나갈 온갖 작물의 싹을 틔웁니다. 밭 만드는 일이 “쉰아홉/ 밭을 만들며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거시기는 오그라붙고/ 오줌도 졸졸 나오는데/ 그나마 보기 드문 진노랑”(「고들빼기처럼」에서)일 정도로 된 힘을 쓰는 것이라면, 초록생명을 틔우는 일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섬세하고 부드러운 힘을 써야합니다. 덩치가 산만해도 별 수 없습니다.
별 수 없지 않은가
- 오철수
쪼그려앉아
120개쯤 구멍이 있는 판에
좁쌀 크기만 한 방울다다기양배추씨를 손으로
일일이
한 알씩
집어넣어
모종을 만든다
성질이 급하든 느리든
많이 배웠던 무슨 일을 하던 누구라도
별 수 없지 않은가
쪼그려앉아
뭉뚝한 손으로
좁쌀 크기를 집어
한 구멍에 하나씩 넣느니
다 사랑하시는
하느님 같다
생명을 기르는 노동의 형태를 보십시오. “쪼그려앉아/ 뭉뚝한 손으로/ 좁쌀 크기를 집어/ 한 구멍에 하나씩” 넣는 일입니다. 눈도 침침하고 무지무지 답답합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금방 얼굴이 벌겋게 됩니다. 하지만 도리 없습니다. “성질이 급하든 느리든/ 많이 배웠던 무슨 일을 하던 누구라도” 이 일에 맞게 자신의 감각과 몸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명만 생각하는 동작을 익혀야 합니다. 무릇 생명을 기르는 일이 다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온전히 행하는 노동의 모습은 “다 사랑하시는/ 하느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살림의 일 모습이 그렇습니다.
며칠 지나면 그 작은 씨앗에서 싹이 납니다. 경이롭습니다. 하우스를 열고 들어서면 새싹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도시 놈 입이 떡 벌어집니다. 그 며칠! “생채 200구 9판/ 방울다다기양배추 128구 23판/ 대화초 72구 3판/ 서울배추 105구 12판/ 적양배추 128구 10판/ 청경채 128구 6판/ 양상추 128구 10판/ 브로콜리 128구 22판/ 방울양배추 128구 8판// 이게 뭐냐구요?/ 흙살림농장 육묘동에서 수일 내로 밭으로 옮겨 심을 채소 모종입니다./ 실은 이것 말고도 또 이만큼이 더 있으니/ 세는 데만도 한 사나흘 걸릴 겁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심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도대체 감이 와야 걱정을 하던가 하지요”(「아무 생각 없습니다」에서) 며칠 지나면 어엿한 모종이 됩니다. 비닐하우스에 심을 것 먼저 나가고 입하 무렵이면 전부 밭으로 나갑니다. 그걸 쪼그리고앉아 하나씩 하나씩 심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과 대지를 생명적 관계로 잇는 농부의 노동, 생명 모심입니다.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