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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월령의 지혜를 배운다
3월, 흙의 지극한 몸을 만나다
경칩과 흙의 날(3월 11일)과 춘분이 들어 있는 3월은 농사를 준비하는 달입니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산 서울놈이 흙살림토종농장에서 일하면서 강렬하게 체험한 것은 <흙>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일이지만 밭 만드는 일은 정말 힘듭니다. 가을 농사 끝내고 내버려둔 고춧대를 뽑고 밭두렁을 덮었던 비닐 벗겨내는 일도 아닌 일만으로도 녹초가 됩니다. “바삭 마른 고춧대를 뽑으면 하루가 간다/ 밭 가장자리 풀 뽑고 정리하면 또 하루 간다/ 밑거름과 영양소를 주면 또 하루 간다/ 로타리치면 또 하루 간다/ 물을 주고 퇴비가 잘 스미도록 며칠 기다리는 사이/ 씨감자 자르고 볕을 쬐어주면 또 며칠 간다/ 관리기로 두둑을 만들면 또 하루 간다”(「밭 만들기를 하며」에서) 그렇게 보름 넘게 밭 만드는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첫째, 흙은 그냥 농산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 노동으로 생긴 피곤은 다음 날 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과 셋째, 그렇게 밭을 만들며 농부의 몸도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사로 먹고살려면 밭이 몸이 되고 몸이 밭이 되어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보일러 올리고 대충 씻고 잠자기 바쁩니다. 하루는 양말을 빨며 생각했습니다. “집에 와 신을 벗으니/ 양말 바닥이 황톳빛이다/ 세탁기에 넣으면 다른 옷에 물들까봐/ 대야에 따로 담가놓았는데/ 어느새 붉은 흙물이 됐다/ 손빨래를 했는데도 잘 지지 않는다/ 밭일 할 때만 신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혹 마지막까지 지지 않는 저 흙색이/ 워낙 농경생활을 하던 우리/ 살색이 아니었나 싶다/ 오래 전 아버지의 발 같은”(「살색의 기원에 대해」에서) 물론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지만 함께 일하는 정우창 귀농귀촌학교 교장과 웃으며 읽고 소주잔 부딪치고 잠 속으로 직행합니다.
눈뜨면 다시 밭으로 갑니다. 그날은 비닐하우스에 관리기로 두둑을 만든 날입니다. 밭 꼴이 다 갖춰지자 갑자기 흙이 달리보입니다.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뭔가를 품을 수 있게 된다는 게 이런 걸까 싶게/ 성聖스럽고 성性스럽다/ 이전까지의 자기를 버리고도/ 어떤 후회도 없이 누워 있는/ 지극한 여인”(「거룩함을 보다」에서) 같은 느낌입니다. 하우스 안은 이태근 흙살림대표의 말처럼 은은한 자스민향이 가득합니다.
왜 흙을 살려야 하는지 저절로 느낀 밭 만들기 체험이었습니다.
좋은 흙
- 오철수
좋은 흙은 일단
살갗의 감촉처럼
마르지 않는 채로 부드럽다
그러니 꽃이 죽은 화분의 흙이나
하도 밟고 다녀 회색빛 도는
등산로 흙 정도를 연상하면 안 된다
좋은 흙은 지렁이 색처럼 검붉고 윤기가 돌며
냄새도 구수하다
이미 수많은 미생물이
그 안에서 활기차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냥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다
숨을 들이키면 가득 사랑받는 기분이다
이미 흙 생명과 생명을 나누고 있기 때문일 것인데
좋은 사람을 볼 때 느낌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좋은 흙을 보면
그냥 믿음직한 연애의 마음이다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