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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절기의 지혜를 배운다
처서(處暑), 돌이킬 수 없다. 지금의 너를 열매로 맺을 때

처서(處暑)는 24절기 중 열넷째로 8월 23일입니다. 더위가 식어 밤으로는 선선해지고, 서서히 천지가 쓸쓸해지며, 조금 지나면 따가운 햇볕도 누그러져서 풀이 더 자라지 않기에 논두렁이나 산소의 풀을 깎는다고 합니다. 한낮으로는 여전히 햇살 끝이 매섭습니다만 가을로 들여놓은 걸음은 물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처서 지나면 초록들은 더 소유하겠다고 까불지 않고 결실의 일로 마음을 모읍니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문태준「처서」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절기의 특징을 김춘수 시인은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처서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태산목(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태산목(泰山木)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 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처서 지나고」) 태산목이나 우리네 삶에게 여름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초저녁 가랑비가 노파심에 다시 돌아와 태산목을 한 번 더 적십니다. 본래적 마음을 종용(慫慂)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한여름은 더 많은 삶을 채우고자 노력하지만 생은 늘 부족합니다. 특히 소유적 욕망은 무한하기에 그 부족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나간 시간을 벌충하고자 하는 초조한 마음까지 더해집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려고 멀리 갔던 가랑비가 메아리처럼 돌아와 한 번 더 적십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아쉬울지라도 지금, 가을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자기를 익게 하는 것입니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고정희「사십대」에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형상언어가 논의 벼들이 익어가는 풍경입니다.
처서(處暑) 지나
-이성이
연애질한다고
긴 머리카락 깨끗하게 깎여버렸던 경순이 머리통 같은
햇볕
지 아버지
보거나 말거나-
대낮부터
벼 이삭에
박혀
금빛
웃음
이런 햇살이 내리쬐며 익어가는 때, 처서입니다.
이젠 지금까지의 날이 쭉정이든 알곡이든 익어가야 합니다. 사랑에 눈이 뒤집혀서든, 사랑에 대한 책임이어서든 스스로를 긍정하며 자기완성으로 내몰아가야 하는 처서입니다. 흙살림 토종벼들도 이렇게 익어가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 오철수(시인. 문학평론가. 흙살림농장농부)

